시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남겨 두라는 것이지요. 마치 제주해녀가 제일 좋은 전복은 제일 기쁜 날인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 물속 바위에 붙은 채로 남겨 두듯이 말입니다. 말을 아끼고 절제하는 곳에 시의 매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지요. 시인은 왜 이처럼 말을 빙 돌려서 눙치고 에둘러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재미있어서일 것입니다.(P. 12)
시인은 가장 본질적인 것을 서두에서 말합니다. ‘말(언어)로 마음의 물고를 틔우는 것’, 그것을 시(詩)라고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말이 사물을 구분(경계) 짓기도 하고, 마음도 가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말이 있기 전에는 사물을 구분 짓는 일이 없고, 마음을 가르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분도 없고 가르는 것도 없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물을 구분하는 일이 생기고, 마음을 가르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말 때문입니다.(P. 20)
삶의 유한성과 존재의 무상함에 대해, 베일에 가려진 세계와 존재의 비밀에 대해 시인들은 누구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궁금해하는 존재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지구별에 처음 온 ‘어린왕자’처럼 사물을 낯설게 보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존재와 세계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은 시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P. 29)
우리가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노상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살짝 볼 수 있고 잠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본 얼굴이 이어져서 우리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어려 있는 상(像), 여러 겹의 상, 그 상들의 행렬, 그것이 얼굴입니다. 무수한 얼굴 상의 나열, 이것을 ‘기표의 고리’라고 라캉은 말했습니다.(P. 49)
소중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떠나보내고 마주한 암울한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 시인은 한없이 부끄러워합니다. 부끄러운 이름, 부끄러운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슬퍼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거대한 어두움에 짓눌려 저항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원통함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확신을 가지고 노래합니다.(P. 58)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경계 없는 순수한 신경증, 순수한 정신증, 순수한 도착증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현실에서는 세 개의 요소가 겹쳐져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늘 경계는 복합성을 띱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할 때 Complex가 복합성이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복합성의 자리, 경계와 경계가 부딪히는 자리입니다. 이 경계가 얼마나 복합적이냐를 살피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P. 75)
소비사회 속에서 사는 우리의 운명은 수족관에 갇힌 산낙지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게주인은 산낙지에게 필요한 공기와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게주인의 이윤을 위한 것입니다. 포획된 산낙지가 싱싱해야 더 많은 손님이 가게를 찾아올 테니까요. 그러나 주인이 넣어 준 공기가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산낙지가 몇이나 될까요?(P. 118)
우리는 ‘친환경, 친경제’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친환경을 주장하면서 핵발전소를 건설합니다. 전기차 소비를 추진하면서 세금을 뺀 가격에 전기를 공급합니다. 이것이 친경제라고 홍보합니다.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친경제적이라고 하고, 핵발전과 전기차가 친환경적이라고 선전합니다. ‘차가운 자본주의’는 발톱을 숨기고 있지만, 내연기관 자동차의 연료에 붙는 세금이 전기 소비세에도 부과된다면 이제 전기차는 친경제가 아니게 됩니다. 전기차와 관련된 종사자들은 세금 폭탄 아래 놓이게 되는 시한부 기간을 살게 됩니다.(P. 138)